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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 내 이야기

EM Hana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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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생쥐 셰리



그 날 추운 저녁이었다. 지평선 너머로 달이 창백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고, 브리티쉬 왕성의 탑에 걸터있었다. 그 날이 지금부터 내가 하려던 이야기가 있었던 날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수 년 전의 일이다. 나는 그 일을 내 작은 쥐구멍에서 모두 보았다.



나의 왕이신 브리티쉬와 블랙쏜 경은 밤이면 항상 체스 게임을 두면서, 이 왕국의 앞 날에 영향을 줄 문제들에 대해 논쟁하곤 했다. 블랙쏜 경이 브리티쉬 왕의 침소에 가는 중이었고, 브리티쉬 왕은 체스판의 말들을 정리해둔 뒤에 창가에 서 있었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창문이 활짝 열렸고, 브리티쉬 왕은 바람을 막으려 한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찬 바람이 방 안으로 스며들어왔고, 공중에 마치 칼에 베인 상처처럼 갈라진 틈새가 생긴 것처럼 보이는게 있었다. 그 갈라진 틈새엔 별들과 소용돌이치는 성운이 보였고, 방 안의 온기가 그 틈새에 빨려들어가 냉기만이 남은 것만 같았다. 성난 바람이 책과 담요를 방 이리저리 흩어놓았고, 가구가 쓰러졌다.



이 틈새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들어본 어느 목소리와도 다른, 뭔가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이렇게 말했다. (최대한 내가 정확히 기억할 수 있는대로 적자면):



"반갑소, 브리티쉬 왕이여. 나는 시간의 군주요. 그대가 이 소사리아가 아닌 다른 세상에서 왔듯이, 나 역시 그대의 차원이 아닌 그 너머에서 온 자요. 나는 그대에게 경고를 하러 왔소. 그대는 수수께끼의 이방인이 소사리아에 와서 사악한 마법사 몬데인으로부터 세상을 구한 뒤 얼마나 시간이 지난지 기억하고 있소? 그가 불멸의 보석을 깨뜨렸을 때, 그 파편에는 이 세상과 똑같은 모습의 수 많은 소사리아가 들어있었지."



브리티쉬 왕은 천천히 일어서 공중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억하고 있소. 이방인이 다시 돌아오길 자주 바라고 있지요."



"그는 돌아왔소." 목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이곳이 아니오. 보석이 파괴되었을 때, 수 천개의 조각들이 수 많은 차원에 흩어졌소. 그리고 그 각각의 조각에는 이 세상과 똑같이 닮은 세상이 들어있었소. 그대가 사는 세상은 그 중 하나요. 그대는 진짜가 아닌, 진짜 세상을 투영한 것에 불과하오."



브리티쉬 왕은 이 말에 동요했다. 그리고 나 역시 아무 생각할 수 없었다! 어딘가에 진짜 내가 있고, 나는 그저 한낱 그 그림자에 불과하다니. 그리고 저 드넓은 우주에 셀 수도 없을 만큼의 내가 존재하고 있다니?



"내 임무는 이 조각난 세상을 치유하는 것이오, 브리티쉬 왕이여." 목소리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대가 내 뜻을 응해주길 바라고 있소. 하지만 그에 따른 위험도 경고해야겠지. 이걸 치유하려면 끔찍한 댓가를 치뤄야 하오."



나의 왕의 얼굴에서 잠시 근심과 호기심이 뒤섞인 묘한 표정이 보였지만, 그는 이내 자신의 사명을 깨달으며 자세와 표정을 고치며 공중을 향해 용감히 되물었다. "그 댓가를 말해주시오."



"하나의 조각이라도 하나의 우주를 담고 있기에 그 힘은 막강하오. 그리고 그 조각은 항시 어둠의 세력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소. 이미 세 조각이 악에 물들었고, 본래 세계에 그림자군주라는 형태로 나타나 재앙을 초래했소. 나는 여러 번이나 이방인을 브리타니아로 불러 내부 또는 외부의 문제 모두를 막아내 왔소. 하지만 이 세상이 여러 조각으로 나뉜 상태론 결국 위험에 계속 노출될 수 밖에 없소. 우린 이 조각들을 다시 조화를 이루게 해야 하오. 그렇게 해야만 조각들이 공명하여 하나가 되면 본래의 세계와 합쳐질 수 있소. 그리고 하나가 된 조각들과 본래의 우주, 두 개의 우주가 합쳐지면 그제서야 바로소 하나가 될 수 있소."



"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저 그림자에 불과하다면..." 브리티쉬 왕이 의구심 섞인 말을 중얼거렸다.



틈새로 보이던 별들 사이의 빛이 다소 누그러드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그렇소. 그림자는 본래의 것과 하나가 되지. 그대는 더이상 그대가 아닌, 더 큰 그대의 일부가 될 것이오. 그대가 죽는 일은 없소. 그러나, 불멸의 보석이 파괴된 이후에 태어난 수 많은 자들은 본래의 존재가 없소. 따라서 그들은 이 우주가 합쳐졌을 때,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오."



브리티쉬 왕은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이 우주를 치유하기 위해 치뤄야 할 값이 무시무시한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내 백성들이." 그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는 대의를 위한 것이오."



브리티쉬 왕이 머리를 숙였다.



그때 나는 문가에 뭔가가 움직이는 걸 보았다. 두꺼운 빨간 커튼 뒤로 반쯤 몸을 숨기고 있었다. 바로 블랙쏜 경이 거기에 서 있었다. 방 안에 몸을 숨기고 있는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가 언제부터 이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던거지?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이 수수께끼의 목소리가 하는 말을 모두 들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럼 어떻게, 어떻게 그대를 도와야 한단 말이오?" 브리티쉬 왕이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고결함을 일깨워야 하오. 최근 지난 밤마다 그대의 머리 속에 맴돌던 미덕들을 떠올리시오. 그것들이 삶의 미덕들이며, 본래 세상의 그대가 생각해낸 것이라오. 그대의 백성들이 그 미덕을 받아들이고 그 미덕을 품고 살게 된다면 본래 브리타니아와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고, 그 세상과 하나가 될 수 있다오."



공중에 갈라진 틈새가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고, 방 안에 다시 온기가 가득 차기 시작했다.



"나는 오늘 밤 블랙쏜에게 내 생각을 논하려고 했소." 브리티쉬 왕이 숨을 몰아쉬었다. "내 스스로의 생각한게 아니란 말이오? 내 삶이, 내 생각이 그저 다른 나의 그림자일 뿐이란 말이오?"



"아니오." 목소리는 틈새가 닫히는 것처럼 전보다 더 작았다. "그대가 평행 우주의 존재라고 하는게 더 정확하겠군. 그대가 내 요청에 응한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내가 방금 한 말은 다른 세상의 천 명에게도 그대로 한 것이오. 그렇지만 그 모두가 내 요청에 응하는 건 아니라오." 그 말을 끝으로 틈새가 완전히 닫히고,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방 안은 마치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어지럽혀졌다.



"우주를 구하기 위해 이 세상을 파괴하라니." 브리티쉬 왕이 중얼거렸다. "수 많은 나 중에서도 반대하는 이도 있겠지."



블랙쏜 경이 침착하게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오면서 딱봐도 무슨 일인지 몰라 놀한 척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왕이시여, 이곳에 무슨 일이 일어났답니까?" 그가 외쳤다. 여전히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이 놀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친구이자, 그의 왕을 속이기엔 연기력이 부족했다. 왕은 그런 그의 모습을 눈을 가늘게 뜨며 쳐다보았다.



"얼마나 많이 들은건가?" 브리티쉬 왕이 진지하게 물었다.



"듣다니요, 아무 것도요." 블랙쏜 경이 말했다. 그의 머리는 친구의 시선을 피하며, 떨어진 체스 말을 줍기 위해 숙이고 있었다. "전 그냥 체스 게임을 하러 온 것뿐인데요."



그 둘은 탁자 위에 체스판을 올리고 말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게임이란 정말 단순하지, 블랙쏜." 브리티쉬 왕이 뭔가를 곰곰히 생각하며, 하염없이 한 손가락으로 체스판을 만지고 있었다. "흑과 백, 자기 색이 분명한 것처럼 우리 삶도 단순했으면 좋겠군. 어떻게 생각하나?"



블랙쏜 경은 체스 탁자 옆 의자에 불편하게 앉아있었다. "제 생각에 그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은거 같습니다. 욍이시여. 그리고 만일 누군가가, 예컨대 제 친구가, 그걸 그리 여긴다면 대단히 애석할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브리티쉬 왕의 눈이 블랙쏜 경의 눈과 마주쳤다. "하지만 때론 왕을 구하기 위해 졸을 희생해랴 할 때도 있는 법이지."



블랙쏜 경의 눈이 왕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런 졸이라도 삶이 있고, 집에 가족이 있습니다. 왕이시여." 그리고 그는 졸을 집어 움직였다. "이제 게임을 시작하실까요?" 블랙쏜 경이 물었다.



그날 밤 체스 게임은 무서울 정도로 엄숙했지만, 무승부로 끝났다.



다음 날, 브리티쉬 왕은 귀족들을 소집하고 새 미덕 체계에 대한 구상을 선포하며, 이 땅 전역에 미덕의 사원을 짓도록 했다. 그리고 블랙쏜 경은 그에 격렬히 반대했다. 많은 이들이 그가 그렇게 격렬히 반응하는 것에 의아해했다. 그도 그럴게 그는 고결하고 올바른 사내로 잘 알려져 있었고, 브리티쉬 왕과 뜻이 같이 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만의 사원을 짓고, 자신의 생각을 담은 혼돈 이론을 주장하며 성에서 나와 도시의 북쪽 강 너머의 탑에서 살기 시작했다.



비록 둘 사이엔 서로 다른 결정을 한 것에 대한 슬픔이 존재했지만, 둘은 여전히 친한 친구로 남았다. 그리고 가끔 밤마다 내가 왕의 침실 사이를 조심스레 가로질러 갈 때, 왕이 탁자에서 졸을 손에 쥐고 조용히 울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생쥐에 불과하니 누구도 내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없겠지. 이 이야기가 묻히는 걸 방지하기 위해, 그리고 그대가 읽을 수 있도록 내 앞 발로 잉크를 묻혀서 이렇게 적습니다. 나 역시 우리 세계와 우리 백성들에게 닥칠 위험을 두려워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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